NOTE 082. Haven
'Nell - Haven'을 듣고 있는데, 노트 속 짧은 가사가 반복된다. 음악을 들을 때 가사보단 사운드와 목소리, 음색을 듣는 나를 가사로 감동시킨 곡이다. 가사에 완전히 이입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만족을 위한 동정을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나의 세계관이 누군가에게는 dark cave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여기 이곳을 haven이라 느낀다면 내게는 haven이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어떻게 책을 좋아해?"라고 한다든지, 혼자 전시를 보러 가거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혼자 본다니 불쌍하다"라고 한다든지. 그런 아주 사소한 세계관의 차이. 물론 'haven'의 드러나지 않는 후반부처럼 'It's getting worse and worse as I think deeper' 니 그냥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게 맘 편하긴 하다.
새해언니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엄마 아빠의 자녀 세대, 우리 세대의 첫 결혼이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언니는 밝고 맑고 예뻤고, 한복을 입은 엄마와 이모들은 눈이 부셨다. 왕래가 별로 없던 우리 친척들이 다 모이니 북적북적하고, 얘깃거리도 많았다. 제일 어린 애기 두 명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순수한 기운을 뿌렸다. 20년 후 쯤이면 애기들도 결혼을 하겠지. 나는 아직 한참이나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올 해도 반이 지났고 내년이면 나는 졸업을 코앞에 둔 4학년이 될 것이다. 독신으로 살겠다고 장담했던 열여덟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르다는 게 이상하다. 현실은 현실인 것이니 말야. 현실적으로, 그러나 뮤즈를 잃지 않도록.
오늘은 쉬겠다고 해놓고 집 앞에서 무작정 방향을 틀어버렸다. 푸로니쌤이 강의하시는 일러스트레이션 수업 과제전을 보려면 오늘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버스를 타고 서울대 디자인 연구동에 쳐들어갔다. 오늘은 3개월만에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도 하고 결혼식 들러리처럼 입고 있었던 터라 사실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토요일이라 아무도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전시는 굉장히 독특했다. 각자의 스타일이 묻어났고 푸로니쌤의 스타일도 섞여 있는 듯했다. 디테일한 텍스쳐로 묘사된 물고기 그림과, 묘하게 예쁜 빨간색 일러스트에 꽂혀서 가만히 보고 있었다. 바로 윗층에서 졸업작품 전시도 하고 있었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작업물이 있었다. 주제가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장식 연구였나? 연구 자료를 논문 형태로 엮어 놓았고, 연구한 내용을 자기 스타일로 적용시킨 작업도 함께 있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곤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지도를 보면서도 길을 잃어서 한참을 걸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서울대는 거대한 도시 같아서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리알 유희>의 카스탈리엔 같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삶에 대해 생각을 했다. 고리타분하고 애늙은이 같아지는 때지. 수 많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수 없이 많은 가게들과 사무실들이 신뢰와 신용을 바탕으로 얽히고 섥혀 있는 거대한 도시. 살아가는 환경, 자신의 사명으로 맡겨진 일, 그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람들과 살아가는가. 취미와 취향, 사고방식과 세계관. 그런 디테일한 것들이 개미떼 같은 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잔뜩 숨겨져 있을 테다. 나는? 나는 지금처럼 살고 싶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내게 맡겨진 일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표면적인 것들은 변할지 몰라. 하지만 지금 나의 세계관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This is my H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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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2013/06/17 20:05
포스팅 잘 봤습니다.
저도 이 포스팅을 읽고 많은 부분이 공감되더라고요.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가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많이,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변화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독신으로 살 거라고 장담하던 열여덟의 내리씨와 지금 뮤즈를 만나 행복해하고 있는 내리씨처럼 말이죠…
저는 원래 회계사를 하고 싶었어요… 불과 3~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요. 저는 문과였지만 수학이 좋았거든요. 돈 계산 하는 게 좋아 보였어요. 다른 직업들 평균보다는 돈도 많이 벌 것 같았고요.
그런데 재수를 하게 되고 군대를 갔다오고 나이를 먹고 저의 목표는 안 변했는데 현실이 저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어렸을 때야 공부한답시고 이삼년 날려도 별 지장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이삼년 투자했다가 아무것도 못 얻으면 정말 빈털털이가 되기 딱인 처지죠
지금은 딸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저주하고 펄펄 끓는 기름을 끼얹는 정신병자 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희곡작품,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서 그런 공포를 느끼게 하는 신경을 차단하는 정체불명의 약물에 중독된 중년 여성을 그린 소설작품 등등을 보고 있죠… 제가 처음 회계사를 꿈꾸었을 때만 하더라도 삼사년 후에 제가 이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세상이 그런 것 같아요. 언제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이 불안하고도 비이성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 맞게 적당히 자신을 맞춰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하는 희곡장르를 부조리극이라고 하는데요… 인생이 부조리극 같기도 하네요 ㅋㅋㅋㅋ
그러한 현실 속에서 저는 다시 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입니다만 내리씨는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좋은 작품, 좋은 포스팅 많이 만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 참 그리고 뮤즈에게 언제나 좋은 여자로 남아있으시길 기원합니다.-
내리 2013/06/17 20:26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가 있어요. 제목만 들어 본 영화지만 제목이 참 와닿았죠. '대학생'님처럼ㅋㅋ 저도 대학생이고, 요즘 대학생들은 불안해서 미치죠. 안정을 추구하고 숫자에 민감하고. 저도 그래요. 지금 뭔가 빠릿빠릿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맞는 일인가 끊임 없이 의문이 들고. 그래서 괴롭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어딘가에 한 줄기라도 확언이 있을까 싶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말예요. 제가 포스팅에서 "지금처럼 살고 싶다"고 한 저 순간은 아마 가장 안정이 되어 있을 때였겠지만, 말씀하신 대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른다고 하는 불안과 계속해서 흔들거리는 마음이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다들 그런 거겠죠. 우리는 힘든 세대니까요. 괴로운 소설을 쓴 작가는 괴로운 사람일 거예요. 저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글로 드러낼 정도로. 글은 마음을 반영하니까요.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비이성적이고 계획대로 되는 것도 없고.. 그렇지만 우린 잘 하고 있어요. 잘 하고 있다고 믿어요. 저런 소설의 작가들만큼 괴롭진 않잖아요.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뮤즈를 만나는 순간, 그 찰나의 행복을 위해 dark cave를 haven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버티는 거죠. 저의 뮤즈는 저를 좋은 여자로 만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좋은 여자일 수밖에 없게 말예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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